NEO ASSEMB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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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우진과 "신_ 아상블라주"을 정의내릴 전시
NEO ASSEMBLAGE_ 신 아상블라주
아상블라주Assemblage란 말은 1953년 장 뒤비페(1901~85)가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명칭으로 입체주의 콜라주보다 더 많은 물질을 부착하는 작품을 지칭했다. 그는 1954년 이 명칭을 풀 먹인 딱딱한 종이, 나무토막, 스펀지 등의 여러 파편으로 작은 형상을 만드는 기법에도 확대 적용했다. 그는 콜라주는 1912년부터 1920년경까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풀로 붙여 제작한 작품에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54년 리브 고슈 화랑에서 신문, 벽돌, 금속조각 등 버려진 물질들을 쌓아 만든 소형작품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1956년 얇은 금속조각, 나뭇잎, 말린 꽃, 나비 날개 등이 결합된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 전시회를 열었다. 뒤비페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는 어떤 가능성도 부정함으로써 1960년대 정크 아트와 팝아트가 나올 수 있는 미학적 조건을 마련했다.
정크 아트와 아상블라주를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는 없는데, 정크 아트 예술가들은 종종 폐품 같은 것들을 조립하여 표현적인 구성물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표현적인 목적을 위해 비미술적인 재료를 3차원의 조각적인 구성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용어이다. 그들의 작업은 회화에 있어서 추상표현주의와 유사하게 취급되는 용접 조각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적인 목적을 지녔기 때문에 표현적인 추상 조각의 제2 세대로 여겨진다. 아상블라주를 제작하는 많은 조각가들은 팝아트 정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팝아트 전통에 속한 아상블라주는 버려진 물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정크 아트와 구별되어야 한다.
아상블라주, 상황 미술, 환경 미술, 타블로 등의 용어는 분류를 목적으로 할 때는 비교적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사용하는 사람들마다 약간씩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어떤 분류 기준을 사용하든 간에 한 예술가의 작품은 여러 범주에 속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아상블라주는 여러 재료로 구성된 작품들과 다양한 오브제가 상자 같은 것에 모아져서 동시에 전시되는 타블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상블라주는 팝아트, 표현주의 미술, 정크 아트 혹은 펑크 아트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다.
아상블라주란 명칭은 1961년 뉴욕 모마에서 개최한 ‘아상블라주’ 전시회에서 채택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종합적 입체주의를 비롯하여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제작한 콜라주와 작은 구성작품,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코넬의 상자 구성작품, 드 쿠닝, 엔리코 바이(이탈리아 화가), 머더웰, 라우센버그 등이 제작한 콜라주, 알베르토 부리의 거친 삼베를 부착한 그림, 네벨슨, 탱글리, 스탕키에비치, 장 크로티(스위스계 프랑스 화가로 뒤샹 여동생의 남편)의 조각작품, 세자르의 압축된 자동차 집적물, 키엔홀츠의 타블로 작품 등 다양한 양식과 화파를 폭넓게 보여주는 오브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워홀 31, 54, 60, 뒤샹 279) 아상블라주라는 명칭이 이처럼 폭넓게 확대 해석되고,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는 별개의 다양한 오브제 작품들에 적용되자 상대적으로 이 명칭의 유용성은 감소했다.
윌리엄 세이츠는 새로운 예술로 부상한 아상블라주에 관해 정의했다.
“색을 칠하거나 드로잉하거나 깎거나 모방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조립하며,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이미 형태를 갖춘 물질이나 공장의 생산품 또는 예술적 재료가 아닌 것들을 예술품의 요소로 사용하는 구성예술을 말한다.”
‘아상블라주예술’ 전시회 이후 이 명칭은 점차 다양한 오브제들을 모아 상자 같은 것에 담아놓은 작품에만 보다 엄격하게 제학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두 가지로 분류하면 슈비터스의 콜라주 개념을 3차원으로 확장시킨 라우센버그의 콤바인회화와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확장시킨 아르망의 집적작품이다.
쿠르트 슈비터스(1887~1948)의 작품은 당시 콜라주로 불리었지만 아상블라주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허버트 리드가 “콜라주의 최고 대가”라고 극찬한 슈비터스는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초기에는 표현주의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후에는 표현 자체가 미술의 주된 목적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았으며 1918년에 베를린의 슈투름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뒤샹 230) 입체주의 방법을 받아들여 그는 콜라주 작품을 주로 제작하면서 시를 콜라주 방법으로 쓰기도 했는데, 차라와 브르통의 자동주의와 견줄 만했다. 리드가 “제임스 조이스에 필적하는 시인”으로 묘사한 슈비터스는 시에서 동사를 명사로도 사용했으며, 이런 말장난은 뒤샹의 관심사이기도 해서 그는 동갑내기 뒤샹과 교류하기도 했다.
슈비터스는 1918년부터 버려진 물질들인 버스표, 담배껍질, 우표, 극장표, 잡지, 못, 머리카락, 낡은 상품 카탈로그, 끈 등을 사용하여 콜라주로 회화적 구성물로 구축했는데,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시적 느낌을 주었다.(뒤샹 231) 제1차 세계대전 후 하노버에 정착한 그는 1919년에 <메르츠>를 창조했다. 이 제목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상업편지에 써 있는 상업-민영 은행Commerz-und Privatsbank에서 가운데 글자 merz만 딴 것이다. 그는 닥치는 대로 수집한 종이들을 콜라주로 구성한 후 <메르츠 회화>라고 명명했다. 그는 미술을 전통적 소재와 기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이상적 혹은 사회적 동기에서 표현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으며, 이런 시도로 도시 문명의 잔해를 이용하여 새롭고 독특한 형태의 콜라주를 구성했다.
슈비터스는 1923년부터 하노버에 있는 발트하우스슈트라 5번가의 자신의 집에 <메르츠 빌딩>(뒤샹 232)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1932년 창립 당시 그가 가입한 추상-창조 그룹의 잡지는 메르츠 빌딩 조형물 사진을 소개했다. 이 구성물은 점차 석고와 나무로 만들어진 뼈대를 이루게 되었고 내부는 미로와도 같았다. 슈비터스는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삶과 관련된 물건들을 건물 내부로 구성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입체주의 회화 또는 고딕 건축”을 연상시킬 만큼 날카로운 각도와 선명한 형상을 지닌 엄정한 의미의 건축물이 되었다. 그의 집은 1943년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 사라졌다. 그는 시인친구가 쓰다 버린 연필도 주워다 집안에 장식했고, 장 아르프의 아내 소피가 사용한 브래지어도 있었다. 그는 1923년부터 1932년까지 <메르츠>란 잡지를 간행하는 데 전력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낭만적 혹은 빅토리아풍의 옛 물건들이 담긴 ‘상자’ 작품으로 유명한 조셉 코넬(1903~73)은 버려진 물질들을 개인적인 상자 안에 배열하는 방법으로 물질들에서 시와 노래 그리고 향수를 찾아냈다.(워홀 52) 그의 ‘상자’는 구성주의의 형식적 엄격함과 초현실주의의 생동감 있는 환상이 조화를 이룬다. 코넬은 슈비터스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것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시위했다. 그가 상자 안에 자신이 원하는 물질들을 적절하게 넣음으로써 물질들은 더 이상 원래의 물질이 아니라 시인이 선택한 물질이 되어 사람들에게 미학적 경험을 하게 했다. 그러나 슈비터스와 달리 폐기물이나 쓰레기가 아니라 한때 아름답고 소중했던 물건들의 파편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초현실주의 기법을 이용하여 불합리하게 병치시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코넬이 유리를 부착시킨 상자 안에 낯선 물질들을 배열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상투적인 개인적 꿈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의 상자 안에는 오래된 사진, 지도, 때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과 19세기 미국사람들의 그림도 들어 있었으며 깨진 유리조각, 코르크 공, 쇠 조각 등 다양한 물질들이 배열되었는데 그의 어린시절과 그에게 감동을 준 문학과 예술을 뜻했다. 상자 안에 잃어버린 어린시절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꿈이 갇혀 있는 그의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추억과 꿈을 상기하게 했다. 그가 사용한 물질은 팝 물질이었으므로 그를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1950년대 중반 물질들을 콜라주한 라우센버그와 존스도 코넬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본격적으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리처드 스탕키에비치(1922~83)는 뉴욕 태생으로 한스 호프만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파리의 페르낭 레제의 화실과 자드킨 조각 학교를 다닌 뒤 1950~51년 조각으로 전환했다. 스탕키에비치는 용접된 금속조각을 전문적으로 제작했으며, 뉴욕으로 돌아온 뒤 1950년대 초에는 자투리 금속조각들과 오래되고 낡은 기계류 등을 사용하여 조각 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워홀 53) 그는 1951년 어느 날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화실 뒷마당을 파다가 벽돌과 녹슨 쇠파이프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들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용접하여 조각의 부분으로 사용했는데 아상블라주의 시작이었다. 도시의 사실주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이런 아상블라주는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명의 찌꺼기이다. 1951~52년에는 피카소와 콘잘레스의 전례를 따라서 미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와 함께 녹슨 쇠 조각들을 용접했으며 이런 경험으로 버려진 쇠 조각들을 용접하여 조각을 제작하는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후의 작품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구성으로 변했고, 1960년대에는 점차 밝고 서정적으로 진전되었다. 1970년대에는 다시 양식적 변화를 맞아 망치로 두들긴 원과 사각형의 강철들이 서로 맞물리는 추상 구성으로 전환했다. 1997년 4월과 5월 맨해튼에 있는 상업화랑 자브리스키에서 스탕키에비치 회고전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그가 아상블라주의 선구자였음을 새삼 인식했다.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루이즈 네벨슨(1899~1988)은 190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29~30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했으며, 뮌헨에서 한스 호프만의 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1950년대 말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조각된 벽’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것은 많은 상자와 칸막이들로 이루어진 벽 형태의 부조로, 상자와 칸막이들은 의자다리, 금속조각, 난간조각, 꼭대기 장식과 같은 일상의 사물, ‘발견된 오브제’들이 모여 추상적 형태를 이루었다. 이 구조물은 균일한 검정색, 후에는 흰색이나 황금색으로 채색되었는데, 형태의 우아함과 닫힌 형식의 진부함이 강한 대조를 보여준다. 1960년에 제작한 <결혼 예배당 IV>(워홀 54)은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으로 상자 안에는 수백 개의 물질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녀는 가구 일부를 잘라 사용하거나 폐허가 된 집에서 물질을 구하여 재료로 삼았다. <벽> 시리즈의 경우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물질들이 각 상자 안에 가득 들어 있다. 그녀는 주위에 널려 있는 각종 작은 물질들을 배열하고 그것을 모두 동일한 색으로 칠하여 입체적 구성감각이 모두 제거되도록 했다.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을 제작하고 상자 안에는 수백 개의 물질을 배열했는데, 이런 작품들로 아상블라주와 환경조각의 기수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한국 미술계의 블루칩을 넘어 근 5년간 뜨거운 관심이 집중되고 많은 애호가들에게 소장이되는 작가 김우진은, ‘조각가’ ‘조형예술가’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 [Neo Assemblage]를 시작으로 김우진이라는 작가는 미술사 적으로 여러 범주에 속하게 되는 ‘예술가’임을 관객들의 뇌리와 가슴에 각인하고자한다.
[아상블라지]의 새로움을 열게되는 이번전시에서 김우진은 종합적 입체주의를 비롯하여, 평면과 디지털을 융합한 작업들을 선보이며, 그동안 그가 작가로서 걸어온 작품의 진화를 보여줄것이며, 내년에 있을 베니스 비엔날래 2022년에서 펼칠 작업들에 관해, 그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과의 예술적인 대화를 하고자 한다.